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652
한자 忠節祠[金尙台]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장터뒷길 20-14[옥동리 산43]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윤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3년 - 김상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현 소재지 충절사[김상태]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장터뒷길 20-14[옥동리 산43]지도보기
성격 사당

[정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에 있는 의병장 김상태를 기리기 위한 사당.

[개설]

충절사(忠節祠)[김상태(金尙台)]는 의병장 김상태[1862~1911]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먼저 있던 것은 관리 소홀로 없어지고, 현재 충절사[김상태]는 새로 지은 것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금강공원에는 1998년 세운 순국 김상태 의병장 충절비(殉國金尙台義兵將忠節碑)가 있다. 충청북도 제천시에도 김상태의 동상을 세웠다.

김상태는 현재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고, 후에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로 옮겨 살았다. 의병장 이강년(李康年)[1859~1908]의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倡義日錄)』 권2에 김상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처음에 중군장 김상태는 이강년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서하였다. 그러나 왜적에게 저지당하여 오랫동안 의병 부대에 합류하지 못하다가 공[이강년]이 혼자 잡혀 죽었다. 김상태는 공[이강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 그를 만날 수가 없다고 하고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유격전을 몇 년 동안 벌였다. 그러나 마침내 왜적에게 잡혀 대구의 적군 부대로 갔다. 적을 꾸짖고 굴하지 않다가 밥을 먹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원기(源箕)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공[이강년]의 무덤 곁에 묻어 주면 황천에 가서 서로 의지하겠다고 하였다.”

1909년 9월 22일 일본인이 작성한 기밀문서에 의하면 김상태는 부하 40~50명 정도를 데리고 있다고 하였고, 12월 일본 문서에서는 풍기와 단양 등지에서 김상태가 140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정운경(鄭雲慶)[1861~1939]이 지은 『백우 김상태 공 제문(祭白愚金公尙台文)』에 의하면, 김상태는 1911년 음력 7월 그믐 대구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8월 8일 제천의 옥산(玉山) 옛집으로 운구하여 왔고, 9월 12일 김상태의 유언대로 이강년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제문은 정운경이 9월 11일 김상태의 상여가 김상태의 집 앞을 지날 때 지은 것이므로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제문에는 “저 달성(達城)의 옥리(獄吏)가 사납기 이리 같으나 저들인들 의리에 어떻게 하랴. 털끝만치도 해롭게 하지 못하나 꾸짖기를 마지않았다. 단식하여 생명을 끊으니 죽음을 예사로 여겼으며, 어조가 당당하여 절의가 높고 엄하기가 추상과 같았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김상태가 대구의 감옥에서 곡기를 끊고 순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상태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위치]

충절사[김상태]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산43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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