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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04
한자 韓國近代化-汽笛-鐵道
영어의미역 The Railroad - the Whistle of Korean Modernizati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구완회

[개설]

중앙선·태백선·충북선이 만나는 곳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조차장이 위치한 제천시는 철도 교통의 요지로서 철도에 의해 도시가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근년에 자동차 도로가 정비됨에 따라 철도 교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일제 강점기 제천 지역 철도]

근대 이전의 제천은 산으로 둘러싸여 육로 통행이 용이하지 않은 고을이었다. 그러나 대신 남한강 물길이 지역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당시 물류를 담당했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수운(水運)이어서, 강물이 얼어붙는 시기를 제외하면 서해안이나 서울 쪽으로부터 소금 따위를 실은 배가 끊임없이 올라왔고, 내륙에서 생산한 목재나 숯 등을 실은 뗏목이 남한강을 통해 하류 쪽으로 운반되었다.

이러한 물길을 통한 물류의 중심을 완전히 재편한 것이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기 시작한 철도였다. 물론 신작로도 새로 건설되었지만, 물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사회 변화에 미친 영향력의 크기, 경제성에서 볼 때 철도에 비길 수는 없었다. 또한 철도는 신문명의 상징이기도 했다.

제천 지역에 처음으로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20년대 말이었다. 1928년 충북선 철도가 충주까지 이르자 제천에서는 ‘제천철도 기성동맹회’가 조직되었다. 철도를 제천까지 끌어들이려는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나선 것이다. 당시 영월이나 제천에서 재배되는 황색 연초를 실어 나를 수 있고, 강원도의 무연탄을 개발할 수 있는 이점 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충북선 연장은 해방 이후에나 실현될 수 있었다.

제천 지역을 통과하는 가장 중요한 철도인 중앙선 공사는 1930년대 중반부터 착수되었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기초로서, 또한 강원도 지역의 지하자원을 수탈하려는 의도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6년에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고, 부실 공사가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을 받을 만큼 빠른 속도로 추진되면서 1942년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철도의 부설은 지역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먼저 지역 사회와 강원도 일대의 지하자원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철도 개설에 따른 특수를 염두에 둔 금융 기관도 유치되었다.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철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노동자들이 나타남에 따라 본격적인 노동 운동의 실마리도 마련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제천이 이미 상당히 인상적인 ‘도시’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해방 후 철도의 정비와 제천]

해방 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제천 지역은 본격적으로 교통 도시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중앙선과 경부선을 횡으로 연결하는 충북선의 보완, 그리고 강원도 산간 지역으로 연결되는 태백선이 모두 제천을 중심으로 놓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교통 도시로의 발전은 여전히 철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경제적 효과가 이미 입증된 철도 말고는 대안이 없기도 했다.

먼저 공사가 시작된 것은 태백선 쪽이었다. 1949년 연말 제천~송학 사이의 철도가 완성되어 운행되기 시작했다. 비록 9.9㎞의 짧은 거리이긴 했지만, 그것은 태백선의 시작이었다. 공사는 6·25 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속개되어 1953년 가을에는 송학~쌍룡 사이가 철길로 이어졌다. 이때 개통식에는 허정 교통부장관까지 참석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쌍룡~연당이, 그 다음 해에는 연당~영월발전소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어 영월선이 이루어졌다. 이는 후에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태백지구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66년 함백까지 이어지고, 이어 1973년 태백, 1975년 백산까지 연장되면서 그 이름을 태백선이라 일컫게 되었다.

충북선 공사도 때를 거의 같이하여 추진되었다. 경부선의 중간 역인 조치원에서 시작되어 충주까지 이어져 있던 충북선을 제천의 봉양까지 잇는 공사였다. 이 공사는 1955년에 시작되어 1958년에 마무리되었는데, 이로써 중부 내륙에 위치한 제천 지역은 전국 육상 교통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태백선충북선 부설은 주변 지역의 개발, 나아가 한국 경제 개발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 주력을 기울였던 것이 에너지원의 확충과 기간산업 확충,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분산, 고립되어 있던 지역을 하나로 연결해서 서로 융합을 이뤄 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제천 지역을 예로 들면, 영서 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 이웃의 쌍룡과 단양에서 생산된 시멘트와 비료 등을 바깥으로 실어 내는 데에 이들 철도가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가까운 충주 비료 공장의 경우만 해도, 과거에는 공장 가동에 필요한 무연탄을 영서 지역에서 채취하여 중앙선을 따라 청량리~용산~조치원을 지나 충주로 운반하였는데, 그 이동 거리가 무려 400.5㎞나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봉양~목행 간의 29.1㎞로 단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제천은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고도성장 시기의 경제 개발 계획을 가능하게 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제천 지역에는 중앙선 쪽으로 제천역 외에 구학역·봉양역·고명역이 있었고, 충북선과 이어지는 공전역이 있었다. 태백선상에도 장락역·송학역·입석역이 총총히 들어섰다. 도로가 아직 충분히 정비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천의 발전과 이 철도는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철도의 개량과 제천조차장의 건설]

한편, 급속히 증가하는 물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추가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철도의 전철화 내지 복선화 사업이 그것이다. 태백선의 전철화는 1968년에 완료되었고, 충북선의 복선화는 1980년에 마무리되었다. 1988년에는 중앙선의 제천~영주 구간이 전철화되었다. 이는 수송 능력이 현저히 증가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물류 기지로서의 제천의 중요성은 더욱 배가되었다. 1971년의 제천역 신축이나 1982년의 대규모 증축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한편, 철도와 관련한 중요한 시설로서 조차장(操車場)이 건설되었다. 조차장은 철도에서 객차나 화차의 분리·연결을 조절하는 곳으로, 특별히 차량의 입환(入換)이나 열차의 조성(組成)만을 위해서 설치한 정거장을 말하는데, 제천조차장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태백지구 개발에 수반하여 폭주하는 물류를 감당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1960년대 중반 1일 포용 능력[화차를 세울 수 있는 능력] 306량, 조차 능력이 1224량이었던 것을 포용 능력 1440량, 조차 능력 4380량으로 늘리기 위한 이 공사는 제천~봉양역 사이의 7.1㎞ 선로를 복선화하면서 인근의 15만 평[0.50㎢] 부지에 건설되었다. 아주토건과 현대건설이 공사 구간을 동서로 나누어 맡았는데, 1964년에 시작되어 1970년에 마무리되었다. 농경지나 저습지가 많아 지반이 가라앉거나 유실되는 등 곡절이 적지 않았으며, 구간 내의 교량 건설만도 11곳이나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대의 조차장이 제천에 마련되었고, 이 시설을 통해 무연탄과 시멘트, 그리고 각종 산물이 우리나라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화물의 증가에 따라 조차장의 규모는 1980년대 중반에 다소 증설되었다.

[철도에 따라 변모된 도시]

철도의 정비에 따라 지역 사회에는 엄청난 변화가 밀려들었다. 철도가 놓이면서 물길은 급속도로 쇠퇴하였고, 철도와 관련한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들어섰다. 단양과 제천, 그리고 영월 쪽에 들어선 시멘트 공장은 제천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되면서 인구가 많이 증가했고, 여러 종류의 유통업이 크게 성하였다. 영서 지역의 광산 지대에서 풀려 나온 현금이 제천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64년의 산업별 인구 조사는 철도가 들어온 이후 제천읍을 중심으로 한 변화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당시 제천 지역 인구는 14만 9279명이었는데, 제천읍의 경우 산업별 인구 구성이 다른 지역과는 현저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즉, 취업 인구의 37%만이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52.3%가 3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1차 산업과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전국 평균값이 71.6%와 24.5%였던 것과 비교된다.

철도 이용자의 숫자도 뚜렷하게 증가했다. 1960년에 연간 승차객의 수가 71만 2689인이었는데, 1969년에는 109만 7275명으로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것이 1980년에는 164만 4745명에 이르고 열차 승객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인 1991년에는 169만 1915명에 이르렀다. 결국, 1990년대 초에는 제천역에서 열차에 오르고 내린 사람의 수가 하루 평균 1만 명 가까이 되었던 셈이다. 물론, 제천 관내의 봉양역, 공전역 등을 이용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더 많았다. 그야말로 제천은 철도에 의해서 움직이는 도시였던 셈이다.

이 무렵 제천 지역 읍세는 이웃의 어느 지역보다 왕성한 모습을 보였다. 도시 지역에서 생산된 물자는 제천을 통해 영서 지역을 포함한 내륙 지역으로 이동했고, 지하자원을 비롯한 산간 지역 생산물은 제천을 통해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제천에서 보내고 받아들인 화물도 1980년에는 발송한 화물이 83만 6877톤, 도착한 화물이 7만 5046톤으로서, 총 159만 1974톤이나 되었다. 이는 1960년에 발송한 화물이 7만 1040톤, 도착한 화물이 8만 6376톤으로 총 15만 7416톤에 불과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이처럼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기, 제천은 철도 교통의 요지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단양·영월·태백 등지가 모두 제천권으로 들어왔고, 인구의 증가율도 도시 지역인 청주나 충주의 그것을 넘어서면서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980년에 제천읍이 충청북도에서 세 번째로 시로 승격한 것은 그 결과였다.

[철도의 비중 약화와 제천의 변화]

1980년대 이후 그동안 제천의 성장을 이끌었던 철도 환경에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자동차 산업은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던 데 비해 철도에 대한 투자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멘트 산업과 석탄 산업이 사양 산업으로 여겨지면서 철도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소득 증가의 결과로 자동차 보급률도 급격히 높아졌다. 고속도로를 비롯한 도로 건설이 앞 다투어 이뤄졌다.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철도 이용객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1991년 정점에 이르렀던 철도 이용객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특히 2001년에 중앙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감소세가 더욱 뚜렷해졌다. 그리하여 2001년 제천역에서 탑승한 승객이 104만 2375명을 기록한 이후 다시는 100만 명을 넘지 못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면서 2009년은 60만 5949명으로 최저점에 이르렀다.

철도 이용 감소는 철도와 관내 군소 역의 구조 조정으로 이어졌다. 2006년에는 소화물 취급을 중지했으며, 제천 관내 구학역이 1994년 화물 취급을 중단했고, 2004년에는 여객 영업도 중단했다. 뒤이어 공전역도 업무를 중단했다. 이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성장해 온 제천, ‘근대화 과정’에 견인차 구실을 했던 제천이라는 도시가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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