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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699
한자 堤川義林池-堤林
영어음역 Jecheon Uirimjiwa Jerim
영어의미역 Uirimji Irrigation Reservoir and the Woods on the Bank in Jecheon
이칭/별칭 임지(林池)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양기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6년 12월 4일연표보기 - 제천 의림지와 제림 명승 제2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제천 의림지와 제림 명승 재지정
조성|건립 시기/일시 삼국시대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9년연표보기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훼손 시기/일시 1972년 8월 18일~19일
현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 지도보기
성격 저수지
양식 산곡형 저수지
관련 인물 정인지 등
크기(높이, 길이, 둘레) 10.97m[높이]|320m[길이]|1.8㎞[둘레]|7.68m~17m[깊이]
면적 158,677㎡
소유자 국가
관리자 농업기반공사
문화재 지정번호 명승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삼국 시대의 저수지와 버드나무 숲.

[개설]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서 수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농경 관련 유적이다. 충청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湖西) 지방이라고도 불렀는데, 의림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의림지용두산[874m] 남쪽 기슭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저수지로서 본래의 이름은 ‘임지(林池)’였다. 고려 성종 때에 군현의 명칭을 바꿀 때 제천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川)’이라 하였는데, 제천의 옛 이름인 ‘의(義)’자에 저수지의 이름인 ‘임지’의 ‘의’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의림지의 정확한 축조 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고,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于勒)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700년 뒤 이곳에 온 현감 박의림(朴義林)이 쌓았다는 설도 있으나, 제천의 고구려 때 이름이 ‘내토군(奈吐郡)’인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의림지는 호반 둘레 약 1.8㎞, 면적 15만 1470㎡, 저수량 661만 1891㎡, 수심 8~13m의 대 수원지로 현재까지도 의림지가 제천의 중요한 농업 생산 기반으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제천 지방의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북으로는 용두산이 내려다보이고, 호수 둑에는 노송과 수양버들, 30m의 자연 폭포 등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을 제림(堤林)이라 부른다.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暎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는 관광객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1호였으나 지정이 해제되었고, 문화재청이 의림지와 주변의 정자 및 소나무가 어우러진 제천 의림지제림을 2006년 12월 4일 명승 제20호로 지정하였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의림지는 제천 지역의 최대 평야 지대인 제천 분지를 관개하는 농경용 수리 시설로 만들어졌다. 의림지는 주변의 수전 개발을 촉진하고, 궁극적으로 농업 생산량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저수하여 가뭄과 홍수로부터 안전하게 전답을 보호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제천의 의림지를 언제 처음 쌓았으며, 언제 고쳐 쌓았는지에 대한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의림지의 시축 시기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삼한 시대 축조설로서 김제 벽골제 등과 같이 삼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입장인데,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둘째는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대의 악성 우륵이 축조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의림지우륵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기초로 한다. 셋째는 조선 시대에 박의림이나 정인지(鄭麟趾) 등의 인물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의림지 시축에 관한 견해들은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서 입론된 것이 아니라 제천 지역에 전해오는 구비 전승에 의존하고 있어 정설화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다만 의림지는 제천 지역이 고구려의 영유기인 5세기 후반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천은 고구려 영유기 때 이름이 내토군(奈吐郡)이었는데, 이는 시내[川]를 의미하는 말인 ‘내(奈)’에 방죽이나 제방의 뜻을 갖는 ‘토(吐)’의 결합어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奈吐)’는 바로 의림지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의림지 시축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제천시의 의뢰를 받아 1999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의림지의 바닥에 있는 유기질 점토층에 대한 지질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1999년 조사에서는 의림지 바닥의 표층 퇴적물 시추공 시료의 최하부 지층 연대를 추산한 결과 보정 연대 1,034~1,223년 전으로 추정하였다.

이어 2009년 실시한 2차 조사에서는 의림지 제방의 축조 연대를 퇴적물 시료를 분석한 자료에 의거하여 1,900~2,000년 전인 서기 100년 전후라는 연대 측정값을 제시하였고, 아울러 식물 파편을 분석한 자료에 의거하여 1,200~1,100년 전인 800~900년 정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각각 추정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제방 축조에 사용된 의림지 바닥 퇴적물보다는 식물 파편 연대를 의림지 제방의 안정적인 축조 연대로 보고 지난 2000년 조사와 같이 통일 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800~900년경에 의림지 제언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다만 바닥 퇴적물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100년경으로 축조 연대를 소급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의림지가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제언은 제천천 주변에 사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소규모로 만들어진 저수지였을 것이다. 의림지가 삼국의 중심 지역에서 너무 떨어진 변경 지역에 있었고, 또한 지세가 궁벽한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되어 축조한 김제 벽골제처럼 중앙의 지배 세력이 제언 축조에 직접 관련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삼국 시대에 처음 축조된 의림지가 이후 수축을 하게 된 것은 통일 신라 시대인 800~900년대로 보인다. 이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팀이 2000년과 2009년에서 의림지 밑바닥 식물 파편층에 대한 편년 분석에서 안정적 연대로 제시한 800~900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서 8세기 말기인 원성왕 대[785~798]에서 헌덕왕 대[809~826]까지 수해와 한재 등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을 조사해 보면 이 시기에 의림지 수축에 관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의림지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정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의림지가 몇 차례 수축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수축한 이래 고려 시대에도 제언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제방을 높게 수축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토대로 조선 시대에 제방을 복구하는 수축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종 때 박의림이나 세조정인지가 쌓았다는 전승과 1474년(성종 5) 홍윤성(洪允成)의 건의로 수축된 사례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의림지는 연안의 남대지(南大池), 상주 함창의 공검지와 함께 조선의 3대 저수지로 일컬을 정도의 농업 경제상 높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저수지 수축을 추진하였다. 이때 저수지와 보를 관리하는 규정에 따라 수리 조합이 조직되었다. 제천의 의림지수리조합은 1914년에 결성되었는데 이는 충청북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된 것이다. 1914년~1918년에는 의림지수리조합에 의해 의림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 공사를 벌였다. 관개용 수문을 개축하고 통관, 개폐 장치, 간선 수로, 인입 암구(引入暗溝), 넘쳐흘러 나가는 구멍[溢流口] 등을 수축한 것이다. 그 결과 270㏊의 몽리 면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쌀 생산량은 1,400석에서 2,170석으로 대폭 늘어났다.

해방 후인 1972년에는 큰 홍수로 인해 의림지 제방이 붕괴되자 이듬해 의림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 공사를 벌인 적이 있었다. 1972년 8월 18~8월 19일에 홍수가 발생하면서 의림지의 제방 구조의 일면을 알게 되었다. 1972년 당시 의림지는 만수 면적이 15.3㏊[115만 3000㎡]이고, 유역 면적 750㏊[750만㎡], 최고 수심 13.5m, 몽리 면적이 270㏊[270만㎡]였다.

[위치]

제천 의림지제림은 제천 시내로부터 북쪽으로 약 4㎞ 떨어진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제천 IC에서 나와 박달재 방향으로 좌회전한 후 약 1㎞ 이동하면 신동교차로가 있으며, 여기에서 제천 순환로를 타고 영월 방면으로 가다보면 나온다.

[형태]

의림지는 제천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두학천에서 약 5㎞ 북쪽에 위치하는데, 제천시 북쪽 용두산[874m] 남사면과 직치[피재]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지점에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고, 그 물을 제방에 시설되어 있는 북서쪽 수문을 통해 제천 분지에 있는 논에 관개를 하는 역할을 한다. 의림지는 그 하류의 곡지 중앙과 충적선상지에 대한 관계용 용수 조달의 필요성에 따라 상류부 곡지 하천의 자연 입지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의림지는 산골짜기에서 흘러 들어오는 계곡물과 샘에서 분출하는 용수(湧水)를 활용한 ‘심(心)’자 형태의 산곡형(山谷型) 저수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제방은 자연의 경사면을 이용하기 때문에 수심이 깊고 면적 또한 넓어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북쪽에는 동서 길이 약 170m 정도의 토축 제방이 있는데, 이곳 취수구를 통해 북서쪽 피재에서 갈라져 흘러내리는 물을 의림지에 저수하고 있다. 그 서북쪽에는 만수위 물 이상의 물이 자연스럽게 넘쳐흐르도록 만든 수문인 월수구(越水口)가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의림지의 월수구를 통해 넘친 물이 흐르는 하소천과 함께 제방에 설치된 수구를 통해 배수되는 수로가 4~5갈래로 분기되면서 남북 약 5㎞ 정도로 넓게 형성된 들판을 관개하게 된다. 그 남쪽에는 약 300m 정도의 긴 제방이 축조되어 있다.

[현황]

제천 의림지제림은 현재 제천 지방의 대표적인 관광 명승지로서 호수 둑에는 100년~200년 된 노송 400여 그루와 버드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堤林] 명승 제20호로 지정될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그 서쪽에는 최근 높이 30m, 폭 15m의 대형 인공 폭포와 최고 높이 162m의 수경 폭포를 설치하였다. 폭포 밑으로는 250m 길이의 인공 동굴이 만들어져 있으며, 자연 폭포인 용추폭포 등과 어우러져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진섭헌, 임소정, 호월정, 청폭정 등과 같은 정자와 누각이 건립되었으며 또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우륵대[연자암] 이 있어 예로부터 예술가와 시인 묵객들이 즐겨찾는 격조 높은 문화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暎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 등이 관광객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서 우리나라 수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농경 관련 유적이다. 벽골제와 수산제는 이미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지만 의림지만큼은 여전히 현재까지 중요한 관개 수리시설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점에서 의림지가 농업 경제에 차지하는 위상과 경제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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