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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71
한자 李昭應
영어음역 Yi Soeung
이칭/별칭 경기(敬器),습재(習齋),사정거사(思靖居士),이의신(李宜愼),이직신(李直慎)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8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좌의진 의병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사정거사(思靖居士). 후에 이의신(李宜愼), 이직신(李直慎)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활동 사항]

이소응(李昭應)[1852~1930]은 춘천에서 태어나서 성재 유중교(柳重敎)에게 배웠다. 유중교화서 이항로(李恒老)의 심설(心說)을 보완한 것을 계기로 화서학파가 양분될 정도의 논란이 일었을 때에는 유인석(柳麟錫)·이근원 등과 함께 김평묵(金平默)의 태도를 두둔하면서 유중교의 학설을 비판한 홍재구·유기일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유중교가 제천의 장담으로 이주한 이후 유중악과 함께 춘천과 가평 일대의 문도를 이끌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춘천에서 유생·군인·농민이 합류한 의병이 크게 일어나자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강원도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던 조인승을 처단하여 안팎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서울 쪽으로 진출하였다가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후 의진의 지휘권을 종형인 이진응(李晉應)에게 넘겨주고 지평의 맹영재에게 나아가 병력을 빌리려 하였다 도리어 감금되고 말았다. 후에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의 도움으로 풀려난 이후로는 제천으로 가서 유인석을 도와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짓는 등 협력하였다. 호좌의진이 근거지를 빼앗기고 서행(西行)한 이후에는 황해도 금천과 강원도 원주 배양산 등에 은둔하였고, 1898년(고종 35) 유인석이 머무는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후에 귀국하여 여러 곳을 다니며 강학하는 한편, 1906년(고종 43) 유중교가 강학하던 장담에 자양영당(紫陽影堂)을 설립한 뒤 주자, 우암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등의 영정을 봉안하여 화서학파의 의리를 다지는 중심지로 삼았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다시 망명하여 만주 일대를 전전하였고, 1930년 외몽골에서 삶을 마무리하였다.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반장(返葬)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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