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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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現代 |
영어공식명칭 |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방기철 |
[정의]
1876년 개항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강원도 영월 지역의 역사.
[개설]
강원도 영월 지역의 근현대사는 1876년 개항부터 일제 강점기를 근대,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에서의 해방 이후부터 현대로 나눌 수 있다.
[개항기]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을 때 영월은 도호부(都護府)에서 군(郡)으로 격하되어 충주부에 속하였고, 부내면(府內面)은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다시 전국이 13도 7부 1목 331군제로 개편되었는데, 영월은 충주부에서 다시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1905년 원주군 관할 주천현(酒泉縣)을 영월군으로 이속하였는데, 주천강을 중심으로 원주 쪽에서 왼쪽을 좌변면(左邊面), 오른쪽을 우변면(右邊面)이라 하였다.
개항기 영월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항일 의병 투쟁이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상투를 자르도록 한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이 때 봉기한 의병을 을미의병(乙未義兵), 전기의병 또는 1차의병이라고 한다. 11월 29일 원주에서 봉기한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이필희(李弼熙) 등은 원주를 점령하고 단양으로 향하다가 영월에 집결하였다. 신지수(申芝秀)가 이끈 의병은 청풍·영춘을 거쳐 영월로, 유인석(柳麟錫)·주용규(朱庸奎)·박정수(朴貞洙) 등은 주천과 방절을 거쳐 영월에 집결했다. 영월에 모인 의병들은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의병들은 1896년 2월 10일 영월을 떠나 11일 제천을 점령하였다.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단양·안동·문경·원주·영월 등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다시 의병 봉기가 있었다[정미의병(丁未義兵)]. 정미의병은 이강년(李康年)의 의병부대가 주도하였는데 김상태(金尙台)·김영식(金永軾)·최용출(崔用出)·설창해(薛昌海)·황사문(黃斯文)·조병은(趙秉殷)·김전영(金田榮)·이명수(李命洙) 등의 영월인들이 참여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제천의진(堤川義陣)은 영월에서 시작되었지만, 영월에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미의병 당시 영월은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일제 강점기]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3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영월군은 8면 57개 정(町)과 리(里)로 편성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는 항일투쟁이 일어났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3·1운동]. 영월에서는 천도교 신도 천선재(千善在)가 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영월보통학교 4년 엄정훈과 2년 장준영 역시 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역시 탄로되어 실패하였다. 그러나 4월 21일 주천장날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 강점기 영월에서는 시금광, 철광, 금은아연광 등의 광업이 성행하였다. 1937년에는 영월발전소가 전력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통과시켜 한국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는데, 이런 모습은 영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되었지만, 9월 2일 미8군 사령관 하지(John. R. Hodge)는 포고문을 통해 남한과 북한의 미․소 분할 점령을 공식화하고, 남한에서의 군정 실시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19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줄여 미군정청이라 한다. 10월 28일 46군정대가 영월 지역을 관할하였다. 1946년 1월 춘천에 제100군정청[서부군정청]이 설치되었는데, 제100군정청은 영월과 함께 춘천·홍천·원주·평창·횡성 등을 관할하였다. 이 시기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렬하였는데, 영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월에도 좌·우익 단체가 별도로 존재하였는데, 1947년 3월 1일에는 좌익과 우익이 각각 3·1절 기념 축하 행사를 거행하였고, 행사 후 충돌하기도 하였다. 또 좌익 유격대인 빨치산과 토벌대의 충돌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영월은 1950년 7월 7일 북한군의 점령하에 놓였다가 9월 30일 수복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951년 1월 3일 영월은 소개령이 내려졌고, 3월 24일 다시 수복되었다. 영월화력발전소와 중석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영월을 두고 남북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영월은 폐허가 되었지만, 1957년 함백선 전 구간이 개통되어 영월과 삼척 등 태백산 지구의 지하자원 개발이 활기를 띄었다. 1974년 6월 태백선이 전철로 개통되어 무연탄 수송과 영월화력발전소의 연료 수송이 더욱 용이해지는 등 영월은 에너지원 공급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폐광 및 석탄의 감산 등으로 영월의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었고, 인구 유출로 인구가 감소하는 등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폐광으로 침체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2005년부터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을 추진하여 책·만화·건층·미술·화석·지리·불화 등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들이 개관되었다. 2008년 12월 영월은 박물관 고을 특구로 지정되었고, 박물관 고을 육성 사업은 2009년 신 활력 사업 우수 모델로 선정되었다. 폐광 대체 사업으로 조성된 리조트 동강시스타가 2010년 5월 완공되었고, 2018년에는 드론전용비행시험장이 건립되었다. 다양한 방면으로의 발전을 꾀하고 있는 만큼, 향후 영월은 더욱 활기찬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