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57
한자 三一運動
이칭/별칭 금마리 3·1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엄찬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20일 - 3·1운동 금마리 만세 시위 계획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21일 - 3·1운동 금마리 만세 시위 해산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8일 - 3·1운동 만세 시위 모의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21일 - 3·1운동 금마리에서 독립 만세 시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4월 20일 - 3·1운동 만세연명부 작성
발생|시작 장소 금마리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천도교|영월보통학교|박광훈|박수경|박수항|박수호|탁은상|탁원근|남상은|박수동|원하현|전수길|조종협|홍봉관|이병익|이용현|박수영

[정의]

1919년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

[개설]

강원도 영월군의 3·1운동은 1919년 4월 8일 천선재(千善在)에 의하여 처음 계획되었고, 이후 영월보통학교(寧越普通學校) 학생들의 만세 시위 계획도 있었으나 모두 사전에 탄로되어 실패하고 1919년 4월 21일 주천장날 금마리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대 말에는 한국인들의 반일 운동 기운이 성숙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고종(高宗)[1852~1919]이 갑자기 승하하자, 거족적인 반일 기운이 팽배하게 되고, 여기에 국제 정세의 변화가 가세하여 3·1운동을 점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경과]

영월 지역은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어서 천도교인이 많았으며, 영월의 3·1 독립 만세 시위도 처음에는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강원도 횡성군 정곡면 안흥리에 살던 천도교인 천선재가 영월군 주천면 장날인 1919년 4월 11일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한 것이 첫 번째 계획이었다. 천선재는 4월 8일 영월군 수주면[현 무릉도원면] 법흥리의 최춘일(崔春日)을 만나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고, 4월 9일에는 양변면[현 주천면] 신일리의 최성오(崔成五)를 만나 함께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고 협의하였다. 또 4월 10일에는 수주면[현 무릉도원면] 무릉리의 현성준(玄聖俊)을 만나 만세 시위 계획을 논의하는 등 영월 군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만세 시위를 계획하던 중 천선재가 체포되어 4월 11일 주천장날 계획하였던 만세 시위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어 영월보통학교의 2학년 장준영(張俊永)의 집에서 4학년 엄정훈(嚴廷勳)을 중심으로 영월읍 남쪽 합수(合水) 거리에 영월보통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만세 시위를 할 계획을 세웠으나 4월 15일 탄로되어 이 계획도 실패하였다.

그 후 1919년 4월 20일 영월군 양변면[현 주천면] 금마리의 양변면장을 지낸 박수창(朴受昌)의 집에서 박수창의 아들 박광훈(朴光勳)이 처남 이용헌(李容獻)과 이병익(李炳翼)·박수영(朴受永)·박재호(朴在鎬)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강원도 각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이어진다는 것을 듣고 영월에서도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만세 시위 주동자들은 4월 21일 주천장날을 기하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박수창의 손자인 박춘희(朴春喜)와 김창진(金昌鎭)·박수찬(朴受燦) 등에게 태극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런데 4월 20일 당일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농사일 강연차 마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이는 강연장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박광훈 등의 주동자들은 ‘독립만세연명부’를 만들어 함께 서명하고,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박수경(朴受景)·박수항(朴受恒)·박수호(朴受祜)·탁은상(卓殷相)·탁원근(卓源瑾)·남상은(南相殷)·박수동(朴受東)·원하현(元夏鉉)·전수길(全壽吉)·조종협(趙鍾協)·홍봉관(洪鳳官) 등을 만나 ‘독립만세연명부’에 서명을 받으며 만세 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석명선이 20일에 오지 않고 21일 오기로 하자 박광훈 등은 계획을 다시 변경하여 원래대로 주천장날인 21일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준비하였다. 4월 21일 아침부터 만세 시위 주동자들은 장터에 가는 사람들을 모으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중 석명선이 오전 11시경 당나귀를 타고 수행원들과 함께 금마리에 도착하였다. 석명선은 마을에 도착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하고 농사일에 관한 강연을 한 뒤 다른 마을로 이동하였다.이에 박광훈·이병익·이용현·박수영 등 만세 시위 주동자들은 시위 군중 30~40명과 함께 마을을 떠나는 군수 일행을 막고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석명선이 거절하자 박광훈 등은 몽둥이로 위협하며 석명선의 손에 태극기를 쥐여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군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그 자리에 모인 시위 군중 200여 명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또한 이병익이 석명선에게 ‘독립만세연명부’에 서명하라고 강요하자 석명선이 연필로 희미하게 서명하였다. 그러자 박광훈이 서명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며 수첩을 내놓고 똑똑하게 쓰라고 요구하였고, 석명선은 시키는 대로 다시 쓰고 엄지손가락으로 날인하였다. 석명선이 떠나간 뒤에도 만세 시위 군중은 계속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저녁때가 되자 주천헌병파견소에서 헌병들이 들이닥쳐 시위 군중을 체포하기 시작하면서 만세 시위는 해산하게 되었다.

[결과]

1919년 4월 21일 저녁 무렵 일본 헌병에 의하여 23명이 붙잡혀 주천헌병파견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17명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 박광훈·이병익은 각각 징역 1년, 이용헌·박재호·박수영은 각각 징역 8월, 박수항·박수경·박수조·이용규·원하현·남상은·탁원근·홍봉관·전수길은 각각 징역 6월을 받았고, 탁은상·조종협·박수형은 무죄 석방되었다.

[의의와 평가]

3·1운동은 모든 면에서 한국 민족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역량을 세계에 인식시키고, 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하여 한민족 스스로가 독립에 대한 결심과 인식을 굳게 하였다. 영월의 3·1운동은 1919년 4월 21일 주천장날 하루의 독립 만세 시위로 그쳤지만 항일 의병을 거쳐 이어진 영월 지역의 항일정신을 잘 드러낸 항일투쟁이었다. 영월도 독립 만세 시위의 초기 준비는 천도교인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이후 영월보통학교 학생들과 영월 지역의 유학자들도 참가하여 전 계층을 아우른 항일투쟁이 되었고, 이후의 영월 지역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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