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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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屠日-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용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8년 9월 3일 - 도일바위 전투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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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와석리 협곡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
종결 장소 | 와석리 협곡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
성격 | 사건·사고|사회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김상태 |
[정의]
1907년 9월 3일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서 이강년 의병진의 중군장 김상태가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
[개설]
도일바위전투는 1907년 9월 3일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와석리 협곡에서 발생하였다. 와석리에 주둔 중이던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병진(義兵陣)의 중군장 김상태(金尙台)[1864~1911]는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와석리 협곡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이 전투가 벌어진 바위를 두고 왜병을 무찌른 바위라 하여 무찌를 ‘도(屠)’와 날 ‘일(日)’을 써서 ‘도일바위(屠日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도일바위전투가 있던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파견을 빌미로 고종(高宗)[1852~1919]을 강제 퇴위시켰고, 이와 함께 대한제국 군대 역시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는 한국인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해산 군인은 의병에 참여하여 일제에 항쟁하였다.
[경과]
1907년 9월 2일, 보병 50명으로 이루어진 일본군 1개 중대는 의병을 탄압하고자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주문리에 주둔하였다. 일본군의 주둔 소식을 접한 김상태는 의병 500명과 함께 와석리 협곡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하루 뒤인 9월 3일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결과]
도일바위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주문리로 물러났으며,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서당 훈장 김인여(金仁汝)의 오른쪽 귀를 도려내고 오른팔을 잘랐다. 그리고 주민 네 명을 죽였다. 한편 도일바위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두고 사람들은 왜병을 무찌른 바위라 하여 도일바위라고 불렀다.
[의의와 평가]
영월군은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중심지였던 충청북도 제천과 인접하여 있었고, 김상태 같은 용맹한 의병장들이 등장하여 활약한 곳이었다. 도일바위전투는 영월 지역의 의병 항쟁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