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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524
한자 現代
영어음역 Hyeondae
영어의미역 Present Ag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동환

[정의]

1945년 해방 이후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통 도시였던 제천은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부침하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특히 1980년의 시 승격, 1985년의 충주댐 건설과 그에 따른 수몰 및 인구 이동, 1990년대의 세명대학교, 대원대학 등 대학의 설립, 지방 자치의 발달에 따른 지역 개발과 2005년의 평생 학습 도시 선정, 2010년의 제천 국제 한방 바이오 엑스포 개최 등이 제천 사회를 변화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또한 2010 제천 국제 한방 바이오 엑스포의 개최와 더불어 제천시는 그동안의 교통 도시로부터 한방 특화·의료 관광 휴양 도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해방~6·25 전쟁]

해방 직후부터 미군이 주둔할 때까지의 공권력 공백 시기에 제천에도 건국 치안대가 있었다. 1945년 8월 16일 지금의 전화국 자리에 있던 제천군청에서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한 제천군 치안유지위원회가 조직되어 공화당과 경찰서에 본부를 두고 활동에 들어갔다. 이후 산하에 치안대, 청년대, 선전대 등의 조직을 갖추었다. 당시 제천 시민들은 약 150명 정도의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모아 수용하였다. 이후 일본인들은 미군에게 인계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신탁 통치가 결정되면서 제천에서도 반탁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반탁 운동은 좌우익의 대립을 첨예하게 만들었다. 제천의 경우 대표적인 좌익 세력은 수백 명에 이르는 철도 노조원들이었다. 1946년 각처에서 일어났던 좌익 운동은 같은 해 가을 철도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으로 이어졌으며 제천농교 교장이 철도 노동자를 이끌고 경찰서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천의 좌익 세력도 독립 국가 건설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던 우익 세력과 미군정에 점차 밀리게 되었다.

6·25 전쟁 때 제천 지역은 남한강과 고산 지대라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하여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낮출 수 있었으며 이것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대반격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북한군의 빨치산 활동이 지속되게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제천시 한수면 인근 지역은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월악산에 있던 빨치산들의 무장 게릴라 활동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 복구 등은 타 지역과 같이 이루어졌다.

[철도 교통과 석탄 산업]

제천은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교차하는 교통 도시로 성장하였다. 중앙선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착공한 이후 1942년 4월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중앙선의 건설은 제천의 행정상의 위치를 변화시켜 청풍군이 제천군에 편입되고 제천은 1940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충북선은 1920년 사설 철도인 조선중앙철도선으로 착공되었으며, 1946년 5월 국유화된 뒤 1958년 5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태백선은 1952년 10월 착공하여 1975년 12월에 전구간이 완공되었다. 세 철도선은 산업 철도이다. 특히 태백선은 산업 철도라는 특성상 여객보다 화물의 수송이 훨씬 많다.

교통 도시로서 제천의 부침은 우리나라 석탄 산업의 성장과 쇠퇴에 영향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석탄 산업은 1950년대 이후 한국의 가정용 에너지원의 주류가 무연탄으로 대체되면서 무연탄의 수요가 급증하자 1962년 이래 생산 시설이 확충되었다. 이후 가동 탄광 수가 1972년 136개에서 1988년에는 347개에 이르렀다. 이때가 한국 무연탄 생산의 정점이었다.

그 후 한국 가정의 난방·취사 기구, 주택 구조의 변화에 따라 무연탄의 소요량이 줄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는 무연 탄광의 폐업으로 탄광촌이 폐허화되었다. 남한의 경우, 강원탄전[태백탄전]이 전체의 약 80%의 생산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석탄 산업의 부침은 제천시의 사회적·경제적인 변화의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충주댐의 건설과 사회 변화]

1985년 충주댐의 건설은 제천 지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5개 면에 걸쳐 61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청풍에 있던 한벽루·팔영루·금병헌·금남루 등의 문화재들은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오늘의 청풍문화재단지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학교도 폐교되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제천의 교육]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은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1991년의 세명대학교와 1995년의 대원대학의 설립은 지역의 경제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세명대학교대원대학의 개교는 교수 집단 등 대학 구성원의 특성과 외지 학생의 비율이 높은 특성 때문에 제천 지역의 경제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0년의 제천 한방 바이오 엑스포의 경우도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과 관련 학과와의 협력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세명대학교 지역문화연구소의 역량은 의병의 본고장인 제천의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방 도시 제천]

제천시는 2010년 9월 16일~10월 16일까지 2010 제천 국제 한방 바이오 엑스포를 개최하여 당초 목표인 105만 명을 훨씬 넘어서는 13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유치하는 등 행사를 성황리에 마감하였다. 이와 더불어 제천시는 한방 특화·의료 관광 휴양 도시를 표방하면서 관광 도시로서 좀 더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제천시의 발전 방향을 찾아 나가고 있다.

[행정구역 개편]

제천시는 1980년 시로 승격이 되면서 면 지역이 제원군으로 분리되었다. 1991년 제원군이 제천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제천 시·군이 통합되었으며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제천의 인구는 1960년 12만 4721명, 1965년 15만 2202명, 1970년 16만 2392명, 1975년 16만 9925명, 시로 승격했던 1980년 16만 2013명, 1982년 16만 9447명을 기록했으며, 이후 감소하여 1985년 15만 1760명, 1990년 13만 9928명, 1995년 13만 7070명, 2000년 14만 3710명, 2005년 13만 2864명, 2008년 13만 7229명을 기록하고 있다.

2011년 5월 현재 충청북도 제천시는 1읍, 7면, 9동으로 편성되어 있다. 인구는 남자 6만 9110명, 여자 6만 8182명을 합쳐 13만 7292명이며, 가구 수는 5만 6,823가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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