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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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素昻 |
이칭/별칭 | 조용은(趙鏞殷),경중(敬仲),아은(亞隱),소해(嘯海),한살임(韓薩任),아나가위후인(阿那伽餧後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4월 10일 - 조소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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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2년 - 성균관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04년 - 성균관 수료 |
수학 시기/일시 | 1904년 - 일본 동경부립제1중학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06년 - 메이지대학 법학부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2년 - 메이지대학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우에노공원에서 항의 집회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공수학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단연동맹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대한흥학회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한일합방 성토문」 작성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조선유학생친목회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육성교 제창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대동단결선언서」 작성 선포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대한독립선언서」 작성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대한독립의군부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무총장과 의정원의장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한국유일당촉성회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한국독립당 창당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충칭 임시 정부 외무부장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12월 - 사회당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5월 30일 - 제2대 국회 의원 당선 |
몰년 시기/일시 | 1958년 9월 10일 - 조소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9년 -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8월 15일 - 북한에서 조국 통일상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체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9월 - 서울에서 강제 납북됨 |
출생지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
학교|수학지 | 동경부립제1중학 - 일본 동경 |
학교|수학지 | 메이지대학 - 일본 동경 |
묘소 | 신미리 애국열사릉 - 평양직할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
성격 | 독립운동가|정치사상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국회 의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정치사상가.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조용은(趙鏞殷), 자는 경중(敬仲), 호는 소앙(素昻), 별호는 아은(亞隱)·소해(嘯海)·한살임(韓薩任)·아나가위후인(阿那伽餧後人). 단종 때 생육신인 조려(趙旅)의 17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성룡(趙成龍)이고 아버지는 조정규(趙禎奎)이다.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형은 조용하(趙鏞夏), 남동생은 조용주(趙鏞周)·조용한(趙鏞漢)·조용원(趙鏞元)이고 여동생은 조용제(趙鏞濟)이다. 부인은 오영선이고, 아들은 조시제(趙時濟)와 조인제(趙仁濟)를 두었다.
[활동 사항]
조소앙(趙素昻)[1887~1958]은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할아버지 조성룡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1902년(고종 39)에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1904년(고종 41) 성균관을 수료하고 그해 7월에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동경부립제1중학에 입학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 체결에 격분하여 동경 유학생들과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서 항의 집회를 개최하였다. 1906년(고종 43) 동경 유학생 친목 단체인 공수학회(共修學會)를 조직하고 회보를 발간하면서 주필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1907년(순종 1)에는 국채 보상 운동에 호응하여 단연동맹을 조직하고 활동하였으며, 정미7조약에 분개하여 반일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순종 3) 1월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고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0년(순종 4) 국권을 상실하였을 때에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 대회를 소집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다. 1911년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912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조소앙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편한 뒤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5년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유도하기 위하여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동단결선언서」를 작성 선포하였다. 또한 만국 평화 회의에 출석할 준비로 주권 불멸론(主權不滅論), 주권 민유론(主權民有論)을 골자로 한 취지서를 작성하여 이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 사회당 대회에 한국 문제의 의제로 제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吉林)에서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 등과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김교헌(金敎獻) 등 재만 독립운동가 39명과 함께 공동 서명으로 발표하였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 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부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 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 공화제 헌법의 기초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체(國體)와 정체의 이론 정립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외 홍보 전반에 걸쳐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과 「임시의정원법」의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거쳐 초대 국무원 비서장을 지낸 뒤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19년 6월 조소앙은 파리에 도착하여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외교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만국 평화 회의 대표단 지원을 비롯하여 만국 사회당 대회와 국제사회당 집행 위원회의 활동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또 네덜란드로 다니면서 한국의 자주 독립과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고, 노동당 지도층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로 영국 하원에도 한국 문제를 정식 제기하도록 활약하였다.
1921년 국제사회당 대표단으로 러시아 각지를 시찰한 뒤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그해 5월 베이징으로 돌아가 공산주의 비판문인 「만주리선언(滿州里宣言)」을 발표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상하이로 돌아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무총장과 의정원의장을 지냈다. 1927년 국내에서 결성된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호응하였고, 분산되어 있는 중국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하여 한국유일당촉성회를 창립하고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조소앙은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독자적 이념 체계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토대로 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하여 만든 정강과 정책인 ‘태극기 민족 혁명론’을 제창하였다. 1934년 삼균주의를 국시(國是)로 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국강령’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 회의에서 채택하게 하였다. 1937년에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40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서 창당 선언에서 삼균주의를 다시 확립하였다.
1942년에는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하여 중국 외교부장 쑨코[孫科]와 손잡고 김규식과 공동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에는 충칭[重慶] 임시 정부의 외무부장이 되었다.
해방 후 조소앙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947년 2월 비상국민회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자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 차 평양에 다녀왔고, 그해 12월 방응모(方應謨)·백홍균(白泓均)·조시원 등과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3만 4000여 표를 얻어 전국 최고 득표자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6·25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해 9월 서울에서 강제 납북되었다.
납북된 후에도 조소앙은 민족 통일과 삼균주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북한 측의 노동당 가입과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며 민족 통일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국제 간첩으로 몰려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8년 9월 10일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한국문원(韓國文怨)』[1932], 『소앙집(素昻集)』·『유방집(遺芳集)』[1983]이 있으며, 1970년 삼균학회에서 『소앙문집』 상하권을 간행하였다.
[묘소]
1970년대 말 평양직할시 형제산구역 신미동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이장되었다. 1984년 삼균학회에서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 의관장으로 만든 묘소가 있으며, 그 옆에 조소앙이 생존에 적어 놓은 자신에 대한 글을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다. 조소앙의 형제 조용하·조용주·조용한의 묘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75년 조소앙을 추모하고 유지를 계승하기 위한 삼균학회가 창립되어 조소앙의 사상을 연구하고 널리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9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8월 15일 북한에서 조국 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03년에는 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약전(略傳)을 비석에 새긴 조소앙선생어록비가 세워졌다. 경기도 양주시에서는 2012년 말까지 조소앙의 생가를 포함한 남면 황방리 1만㎡에 기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